[ 경건칼럼 - 2024년 10월 11일 ]
죽지도 못하는 사명자
Ⅰ. 본문의 배경
선지자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았지만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큰 풍랑을 만납니다. 그리고 풍랑의 원인을 알기 위해 뽑은 제비에서 뽑혀 뱃사람들에 의해 바다고 던져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고 그는 물고기 뱃속에 삼일 동안 있으면서 장문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 속에서 결국은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토해내고 새로운 소명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Ⅱ. 요 나의 소명과 불순종
A. 불순종의 원인 : 편견
그러면 도대체 요나의 불순종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앗수르는 북방에 있는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수시로 침공하고 괴롭히던 신흥국가였습니다. 이 나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당하고 고통을 겪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편견과 미움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성화의 길에서 끊임없이 찬란한 진리의 빛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편견과 아집이 생각과 정신 구석구석에 배어서 언제든지 우리의 편견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고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소명은 받았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찬란한 빛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편견과 그리고 교만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B. 끝나지 않는 부르심
그의 불순종으로 사람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졌고 그 자신도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그는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끝나지 않은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목적 없이 아무 방향으로 달려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어서 그것을 따라서 가는 것이고, 그것을 따라서 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러니 은혜가 없다면 신자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요나는 물고기 배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만약 물고기가 요나를 바다 깊은 곳이나 돌이 많은 곳에 토해 놓았다면 그는 다시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살아난 요나에게 하나님은 다시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C. 사랑이 없을 때에도
우리는 이어지는 요나서 3, 4장을 통해 요나의 순종이 충심에서 우러난 순종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요나에게는 니느웨 백성을 향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충심으로 복종하지 않은 사람의 봉사를 통해서라도 결국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큰 사랑의 계획을 이루시는 주님의 주권과 위대한 자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식을 때에도 우리가 여전히 소명을 따라 사는 것은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섬기며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은혜 생활에 있어서 요동치는 존재들입니까. 사명의 자리에서 서 있을 때 우리는 은혜가 떨어진 것도 발견하게 되고 내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음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에서 멀어졌을 때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말고, 처음 하나님이 자신을 불러주셔서 그 자리에서 살아가게 하실 때에 그 소명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회복하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Ⅲ.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결국 하나님은 소명감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도 없는, 민족주의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요나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자리가 있는데 그곳을 떠난 사람들이 있다면 잘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소명을 주셔서 부르신 사람들을 다시 시작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오류와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며 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합시다. 여러분들이 이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스펄전과 함께 QT - 2024년 10월 11일 ]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예레미야애가 3 : 41)
기도는 우리에게 자신의 무가치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우리처럼 교만한 자들에게 아주 유익한 교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지 않고 그냥 은혜를 베푸신다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 전혀 모를 것입니다. 참기도는 우리의 부족한 것들을 조사해서 적은 일람표요, 꼭 필요한 것들을 적은 목록이요, 우리의 숨겨진 가난을 드러내는 게시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부요함을 우리에게 주십사고 요청하는 청원서인 동시에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고백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건강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자아를 항상 비우고 그곳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주를 의지할 때입니다. 자기 안에서는 항상 가난하되 예수님 안에서는 항상 부요해질 때, 개인적으로는 물처럼 약하지만 하나님을 통해서는 큰일을 이룰 수 있을 만큼 강해질 때, 그때가 가장 건강할 때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높이는 한편 피조물인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인 재에 엎드리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기도는 기도가 가져다주는 응답 외에도 기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기도하는 성도에게 대단한 유익을 줍니다. 달리기 선수가 매일 달리기 연습을 함으로써 경주할 수 있는 힘을 얻듯 우리는 거룩한 기도의 수고를 통해 인생이라는 큰 경주를 뛸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어린 독수리인 우리가 저 구름 너머로 날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그 날개에 깃털을 달아 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용사들 허리에 허리띠를 졸라매 주어 그들이 단단히 죈 힘줄과 근육을 가지고 나가 싸울 수 있도록 내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성도는 달려갈 길을 달리기 위해 나온 강자처럼 기뻐하며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골방에서 나옵니다. 여호수아의 칼보다 더 크게 아말렉 족속을 패주시킨 모세의 들려진 손, 아람군의 패배를 예고하며 엘리사 선지자가 방에서 쏜 화살,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약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싸 주며, 인간의 어리석음을 천국의 지혜로 바꿔 놓으며, 환난에 빠진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가져다줍니다. 기도로 해낼 수 없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오 크신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자를 가장 잘 나타내는 증거인 시은좌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오늘 하루를 지내는 동안도 그 시은좌를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 J.I패커와 함께 QT - 2024년 10월 11일 ]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 1 : 3, 4)
세차게 맞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잘게 부서져서 그 하나하나의 조각들이 몇몇 굶주린 영혼들을 위한 양식이 될 것이다. 그것은 감정 이입에 의한 통찰력과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지혜라는 의미에서 음식이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같이 지금 당신을 파괴하는 힘들고 쓰라린 경험들은, 당신이 다른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생명의 통로가 되기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진실한 대답은 종종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그것은 어제의 도덕적 과오에 대한 징계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미래에 당신을 어떻게 사용하려 하시는지,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위해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당신은 전생애 동안 어떤 형태로든지 고난이 계속될 것을 예상해야 한다(1992b:263, 264).
묵상: 고난은 나를 하나님의 생명의 통로로 만들 수 있다.
[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 2024년 10월 11일 ]
성경의 교훈을 가르쳐주는 교리
하나님께서는 교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옹호하셨으나, 조사 결과 복음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최근까지는 말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그분에 대한 진리를 믿는 것이 곧 자유라고 분명히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하찮게 넘길 사항이 아니다. 바울은 그에 대해 마음으로 순종해온 “교훈의 본”이라고 했다(롬 6:17). 그것은 하나의 기준이자 척도요, 모범이다. 진리를 가늠하는 기준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다른 본문에서 바울은 그에 대해 “하나님의 모든 경륜”(행 20:27, 표준새번역)이자 “바른 말”이요,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딤후1:13-14)이라 불렀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그 진리를 믿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다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요이 1:9, 표준새번역). 그 교리를 떠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것과 같다. 반대로 자신이 믿는 바를 잘 돌아볼 때 자기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딤전 4:16 참조). 지금까지는 변함없는, 훌륭한 교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복음주의자들도 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왔다. “그리스도는 하나 되게 하시지만, 교리는 분열시킨다”, 또는“‘당신은 누구를 믿습니까?’라고 물어야지,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성경적 교리의 의미를 축소시키려는 게 일반적 분위기이다.
조지 바나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전하는 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조사해왔다. 조사를 진행하면서 그는 그들이 성경적 신학을 가르치지 않고 있으며, 그렇기에 세상과 다르게 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이혼율이 미국 전체 이혼율과 거의 같다고 말한다. 9퍼센트 정도가 십일조를 하고 있다. 순결 서약을 했던 만 이천 명의 청소년 중 80퍼센트가 다음 7년 안에 혼외 성관계를 갖는다. 전통적 복음주의자 중 26퍼센트는 혼전 성관계가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가톨릭 신자와 주류 개신교도들보다 더 이웃집에 흑인을 들이기를 싫어한다.
바나의 연구에서 복음주의자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격적으로 헌신했고 현재 자기 삶에서도 중요한 분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몇 가지 사항에 동의해야 한다. 예수님은 죄 없는 삶을 사셨다는 것, 영원한 구원은 행위가 아닌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 사탄이 존재한다는 것. 바나는 미국인의 7~8퍼센트가 이 그룹에 포함된다고 한다. 그들은 사실상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다.
하지만, 바나는 복음주의자 안에서도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또 하나의 그룹을 나누었다. 이들은 “성경이 곧 윤리적 잣대”이며 “절대적 윤리는 존재하고 그것은 성경을 통해 전달되었다”고 인정하는 이들이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창조주이며 지금까지도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성경의 교훈은 모두 정확하다는 것을 믿는다. 복음주의자들 중에서도 이 그룹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성경적 교리를 귀찮게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이들이 세상과 정말 다르게 산다는 게 놀랍게 여겨질 것이다.
로널드 사이더는 『그리스도인의 양심 선언』(IVP 펴냄)에서 세상과 구별되게 사는 이들의 삶을 설명했다. 인터넷‘ 성인 전용’ 컨텐츠를 피하는 이들의 수는 일반인들에 비해 9배나 된다. 정당한 이유로 특정 회사와 상품을 불매하는 이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비해 4배이며, 해로운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에 특정 영화를 보지 않는 이들은 2배이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들은 일반 성인에 비해 3배 정도 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시간을 내어 봉사 활동을 하는 이들은 2배 정도다. 성경적 세계관을 견지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49퍼센트가 한 주에 한 시간 이상 가난한 자들을 섬기기 위해 시간을 낸 반면, 성경적 세계관을 갖추지 못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29퍼센트,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22퍼센트만이 그렇게 했다.
결론은 신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이더는 이렇게 덧붙였다.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다양한 행동을 살핀 바나의 연구 결과는 신학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한다. 성경적인 신학이 정말 중요하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수치스런 행위에 종지부를 찍으려면 교회 안에 올바른 신학적 믿음이 자라도록 기도해야 한다.
[ 은혜와 사명 - 2024년 10월 11일 ]
하나님은 망가진 사람들의 망가진 사명, 망가진 은혜를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 성구 ]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욘 2:6)
[ 내용 ]
저는 크리스털 컵을 몇 세트 선물 받았습니다. 정확한 가격을 모르겠지만 싼 것은 컵 하나에 2만 원 정도 하고 꽃병 같이 큰 것들은 30만원씩 가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것은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지만 어느 날 다른 그릇과 부딪히는 바람에 주둥이 부분이 약간 이빨이 빠졌습니다. 그냥 쓸 수도 없지만 아까운 생각이 들어 버리지 않고 있는데, 하루는 신문을 보니까 보증서를 갖고 이빨이 나간 컵을 갖고 가면 새것처럼 고쳐준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이빨 부러진 것만큼 키를 낮추어서 갈면 키만 좀 낮아지지 새것과 다름없이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A/S를 받았고, 그 컵은 다른 컵들보다 키는 작지만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컵이 깨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그냥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요나도 불순종하지 말았어야했는데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어야 했나요? 요나가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을 빚게 한 죄과를 지고 자신의 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아 사명의 자리에서 내침을 받아야 했을까요? 그래서 요나는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이 그 일을 완수하는 것을 이를 갈며 지켜보아야 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사람에 매이지 않고 그렇게 깨끗하게 일을 처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그런 깔끔한 방법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번거롭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척척 일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실 수 없으시지만 비참하게 망가진 사명자를 다시 고쳐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사명의 자리에서 불순종으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주 일어나는 것은 너무 심각한 상태이지만 우리가 항상 옳은 일만 행하고 살 수 있는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큰 사명과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큰 은혜를 받았지만 불순종으로 망가져 버린 사명자 요나도 하나님께서 고치셨습니다. 물론 ‘불순종 했던 선지자’라는 오명은 늘 요나를 따라다닐 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성경에 너무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그의 이름은 불순종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입장이고,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게 하시고, 다시 찾아와 사명을 일깨워 주심으로 망가져 버린 은혜의 세계를 회복시키셨으며, 다시 요나를 통해 이루기 원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망가졌다고 버리지 않고, 다시 고쳐 사용하시는 것, 이것이 사명자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 묵상 ]
우리가 사명의 자리에서 실패할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았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실패한 사명자를 보실 때, 그가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해 진노하시기 보다는, 비참하게 된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미끄러지더라도 이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100일 교리 묵상: 은혜와 사명 - 부흥과개혁사 ]
[ 은혜와 사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