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칼럼 - 2025년 05월 21일 ]
정금같이
1. 아무리 생각해도
욥은 고난의 초기에는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욥의 신앙도 한계에 부딪혔고, 자신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며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이 고난 받는 것을 불평하다가 나중에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욥은 앞으로 얼마간 고난이 더 지속될지 모르지만 이때가 지나면 자신도 알지 못했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찌꺼기와 같은 죄악들까지도 깨끗하게 되어 정금과 같은 사람이 되어 있으리라는 한 차원 높은 신앙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2. 생각은 달고 경험은 쓰다
우리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렘 17:9)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쉽게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깨닫는 것 말고, 경험적으로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생각만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했을 때에는 마음이 아프지 않지만 경험적으로 알게 되면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밀려옵니다. 욥 또한 고난이라는 경험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을 발견하였고, 그 찌꺼기들을 다 토해내기 위해서는 연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반복되는 단련
순도 99.9%의 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금을 용광로에 녹이고, 굳히는 과정을 여러 번 거쳐야 합니다. 한 번에 아무리 높은 온도로 오래 가열해도 미세한 찌꺼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여러 번 높은 온도로 녹이고, 식히고 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정금이 나오듯, 우리도 반복되는 연단의 과정을 통해 정금과 같이 만들어집니다. 우리를 한번 연단하셔서 탐욕을 제거하시고, 다음 연단을 통해서는 허영을 제거하시고, 그 다음은 교만···. 이 과정은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습니다. 얼마나 정결하게 되어야 하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래도 어찌되었건 그 과정을 통해 신자가 정금과 같이 나온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4. 시련의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목해야 할 때
원치 않는 시련을 당하면서도 그 때를 지혜롭게 넘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목을 하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 코를 박고 있을 때에는 이 불행을 몰고 온 원인을 어떤 상황이나 사람에게서 찾으면서 그 상황과 사람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 상황과 사람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죄를 더하기 전에 눈을 들어 하나님 한 번 보고, 자신을 한 번 보면서 그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을 알게 될 것입니다.
5.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특히, 원치 않는 사물의 질서 가운데로 나를 몰아가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욥처럼 고백해 봅시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하나님은 우리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어찌 연단 받는 우리를 홀로 두시겠습니까.
불같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께 순종하리라고 마음을 정하고 그대로 실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때에 연단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새로운 진리를 통해 우리를 더 정금 같은 인격의 신앙인으로 빚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 스펄전과 함께 QT - 2025년 05월 21일 ]
“기이한 인자." (시편 17 : 7)
우리는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의연금을 보낼 때 돈이나 물건은 잘 보내는데 마음은 함께 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 점에 대해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자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무엇을 베푸시든 항상 사랑의 마음으로 베푸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풍성하고 호화로운 식탁에서 다 식어빠진 고기와 부서진 빵 몇 조각을 우리에게 보내시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접시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을 떠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거기에 주님의 향기로운 사랑의 양념까지 쳐서 주십니다. 또 우리 손에 금빛 나는 은혜의 징표를 쥐어 주실 때도 우리가 그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 손을 꼬옥 잡으며 쥐어 주십니다. 이처럼 주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태도는 그 은혜 자체만큼이나 소중하고 귀합니다. 그는 긍휼을 베푸시려고 우리들 집을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근엄한 방문객이 가난한 사람 오두막집에 온 것처럼 거드름을 피시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못 사는 것을 멸시하거나 우리의 연약함을 비난하시지도 않고 대신 우리 옆에 다정히 앉으십니다.
오,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그분의 얼굴에 나타난 그 다정한 미소를 한번 보십시오! 그 은혜로운 입술에서는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 같은 귀중한 말씀들이 나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사랑과 애정은 얼마나 깊고 넓은지 모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4분의 1페니짜리 동전밖에 주시지 않았다 해도 그것을 주시는 주님의 방법이 어찌나 은혜스러운지 그것이 4분의 1페니짜리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는 그가 기쁘게 들고 다니시는 금빛 바구니에 그것을 담아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의 표면에는 피 흘리는 가슴이 인 쳐져 있기 때문에 주님이 베푸시는 그 사랑의 진실성을 도저히 의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주시되, 아낌없이 풍성하게 주시지 절대 감질나게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귀찮고 짐스러운 존재라는 힌트도 전혀 주시지 않습니다. 그의 은혜를 받아먹고 사는 우리 가련한 인생들에게 절대 쌀쌀맞은 표정을 짓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신이 베푸시는 그 긍휼을 기뻐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품에 꼭 안으시고 자신의 생명까지 주십니다. 우리는 거기서 오직 주님의 가슴에서만 풍겨 나오는 나드유 향내를 맡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벌집에서는 단내가 나는데, 그것은 그의 영혼 속에 있는 사랑의 본질이 그 안에 함께 섞였기 때문에 나는 향내입니다. 오! 이처럼 보기 드문 사랑과 애정을 쏟아 우리와 교제를 나누시다니 이런 교제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주여, 우리가 그 교제의 복됨을 끊임없이 맛보아 알 수 있게 해주소서!
[ J.I패커와 함께 QT - 2025년 05월 21일 ]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눅 11 : 3)
필립스(J. B. Phillips)는 이 절을 다음과 같이 정확히 표현했다. “우리에게 오늘(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옵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그날 주어진 만나를 거두어들일 것을 명령받은 것처럼, 우리는 날마다 양식을 구할 것을 명령받고 있다.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은 날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필요한 양식을 구해야 한다. 즉 없어도 살 수 있는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의 공급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 탄원은 결코 탐욕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한 것을 주지 않으심으로써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1994a:189).
묵상:내가 오늘의 양식을 위해 기도했을 때, 내게 오는 것이 많든 적든 간에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을 것인가? 나는 그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것인가?
[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 2025년 05월 21일 ]
새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생의 목표와 필생의 사업을 다시 생각하라고 요구하신다. 인생은 재미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나날들이다. 혹시 마음속으로 영원한 나라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가? 단순히 돈 버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늘나라와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는 현실에 의문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의 성공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인생의 근본적인 일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꿈을 짓밟지 말라. 바쁘다고 묻어두지 말라. 오던 길에서 옆길로 새라는 손짓을 애써 외면하며 고집부리지 말라.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의 종들이 해온 대로 해보라. 상당 기간 혼자 금식하며 기도해보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앞두고 40일 간 홀로 금식 기도하셨다(마 4:1-11). 열두 제자를 부르기 전에도 밤을 새우면서 기도하셨다(눅 6:12).
국제 OMS가 인도 선교사로 파견했던 웨슬리 듀웰(Wesley Duewel)은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하기 위해 최소한 성경을 50장은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바쁘게 생활하는 동안 경건하지 못한 생각이 마음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홀로 만나기 전에 성경을 50장 이상 읽고 한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도하심을 받을 때가 많았다.” 엘리야는 성령님의 인도로 밤낮으로 40일 동안 걸어 호렙산 동굴에 들어가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시리아와 이스라엘 왕 및 자신의 후계자에 대해 지침을 받았다(왕상 19:11-18).
성경은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한다(엡5:18). 술을 많이 마시면 취한다. 성령을 많이 마시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면 우리는 성령을 받을 수 있다(갈 3:2). 하나님의 말씀으로 취하기 전에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다. 금식 기도하는 것도 말씀에 취하기 위해서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리의 모든 기능은 예민해져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게 된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 속으로 깊이 잠겨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 말씀에 흠뻑 젖을 때 말씀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심령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때 우리 마음은 하나님께서 연주하시는 새 곡조에 공명하게 되는 것이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날을 정해 금식 기도를 했다. 1743년 11월 3일 목요일, 그는 금식하며 열왕기상 17-19장, 열왕기하 2- 4장, 출애굽기 3-20장을 읽었다. 그가 아브라함의 믿음과 요셉의 시련에 대해 읽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 “나는 몇 달 동안 절망 가운데 빠져 있었기 때문에 과연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나같이 사악한 인간은 개선될 여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게 있는 소망을 다시 살려주셨다.” 이
법칙은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성령님께서 방향 전환을 권유했을 때 인생의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고 속력을 줄이라. 그리고 기도와 금식이라는 팻말이 붙은 조용한 우회 도로로 빠지라. 하나님과 말씀과 함께 24시간 동안 조용한 시간을 가지라. 믿거나 말거나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당신을 만나주실 것이다(고후 6:16-17).
[ 은혜와 사명 - 2025년 05월 21일 ]
삶은 사명에 의해 완전해 집니다.
[ 성구 ]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요 9:4)
[ 내용 ]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한 여인이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으며 울부짖었습니다. “저의 삶은 너무 권태롭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겠어요.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요.” 테레사는 그 여인에게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그래요. 제가 살고 있는 인도에 오시면 진정한 삶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 꼭 한번 와보세요.” 그래서 그 여인은 인도로 갔습니다. 막상 가서 보니 거기에는 죽어 가는 사람들. 질병으로 거동도 못하고 앓고 있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거기에서 그 여인은 테레사 수녀와 같이 그들을 돕고 보살폈습니다. 온종일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일에 자기 삶을 쏟다보니 삶의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그 여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인도에 오시면 삶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신 말씀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하여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새로운 기쁨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은 몸은 살아 있어도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앤드류 머리(Andrew Murray)는 그의 책 『How TO Work For GOD』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삶은 일에 의해 완전해진다, 그 숨겨진 성격의 최대의 표현과 능력은 그 일에서 발휘된다. 그러므로 일을 통해 신앙생활의 숨겨진 아름다움과 신령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일은 하나님의 도구된 존재로서의 자녀들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위치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일은 생명의 최고 표현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까? 그저 말로만, 여러분이 누구인지 입증하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은 말이 아니라, 헌신의 삶이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우리는 일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하나 접하게 됩니다. 아들 둘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둘에게 각각 포도원에 가서 일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한 아들은 가고, 한 아들은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사명을 따라 살지만, 어떤 사람은 그 사명을 내던진 채 삽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그 각각에 삶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보응하실 것입니다.
[ 묵상 ]
세상 사람들도 각종 직업 활동을 통해, 열심히 일함으로 말미암는 만족과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만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일함 없이는 참된 영혼의 만족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까?
[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100일 교리 묵상: 은혜와 사명 - 부흥과개혁사 ]
[ 은혜와 사명 ]
[ 청교도묵상 - 2025년 05월 21일 ]
어린 양의 혼인식 - 스펄젼
어린 양의 혼인식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분께 존귀를 돌리세. 이는 어린 양의 혼인식이 다가왔고, 그의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 이제 그녀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라."고 하더라.}(계 19:7-8)
오늘 아침 저의 주요 목표는 여러분에게 축복되고 영광스러운 연합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합은 교회와 주님 사이에 거행되는 "어린 양의 혼인식"이 될 것입니다. 저의 설교의 목표점은 희생제인 어린 양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시작일 뿐만 아니라 끝이며, 은혜로 이루어진 신성한 전체 성전 건축물의 기초석이 될 뿐만 아니라 맨 마지막의 갓돌이라는 점입니다. 속죄 사역의 극치를 이루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혼인식입니다. 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이 혼인식을 설명하겠습니다.
1. 먼저 이 혼인식 전에 일어날 일들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혼인식이 거행되기 전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창녀 교회의 멸망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대신 다른 구원의 수단을 제시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라도 다 창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러한 제도는 완전히 멸절 되고 불에 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에 반대해서 세워진 것은 모두 던져져서 홍수 속에 휩쓸린 맷돌처럼 가라앉을 것입니다.
저는 그 시간이 오기를 희망합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힘있게 외쳐 말하기를 "큰 바빌론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요, 모든 더럽고 가증한 새의 소굴이로다.}(계 18:2)라는 외침을 듣게 되기를, 우리 주님이 빨리 오시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우리는 결혼식 전에 특이한 음성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음성이 나서"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너희 모든 하나님의 종은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보좌에 있을 수 없습니다.
중보자이시며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한 분이 어린 양으로서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보좌에서 나는 음성을 높임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지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이 음성은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또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요 20:17)는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의 보좌에 아버지와 함께 앉게 되는 영원한 보장을 받게 된 그가 찬양 가운데 여전히 우리와 연합하여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제로 죽으셨으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의 교회를 주셨습니다. 이 교회는 어린 양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2. 어린 양의 혼인식은 아버지의 영원한 선물의 결정체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믿는 자들을 그의 아들에게 주셔서 그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그의 죄사함의 언약이 되셔서 때가 차매 그들의 본성을 짊어 지시고 그들 죄에 대한 형벌을 치르시고 그들을 자유롭게 해 주시고 자신의 소유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이 혼인식은 그들 각자에게 있었던 약혼의 완성입니다. 나는 세심하게 구분 짓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에게 있어서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처음 그를 믿었을 때 우리 안에서 우리 각자와 약혼하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와 헤어지기를 원치 않으며 우리 역시 그와 헤어질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 혼의 기쁨이며 노래로, 우리를 기쁘게 하십니다. 그가 여러분을 부르셨다는 것을 기뻐하며 약혼 기간 중에 결혼식을 고대하십시오. 우리의 목적지는 사람들의 아들들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혼인식 날은 교회 몸의 완성을 나타냅니다. 그 때는 교회가 완전해지리라는 것을 이미 말했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지금 만들어지고 잇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의 신랑과 약혼한 교회는 지금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혼인식은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집에 가게 될 것입니다. 축복된 신랑이 와서 우리를 행복의 나라로 데려가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며 구름도 끼지 않고 해도 지지 않는 땅인 주님의 축복된 자들의 집에 거할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교회가 집으로 데려가지는 것은 정말로 행복할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두 말할 수는 없지만 이 혼인식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결코 끝나지 않을 축복으로 들어가게 됨을 나타냅니다.
날들 중의 날인 한 날이 올 것입니다. 모든 투쟁과 위험과 심판이 끝나는 면류관과 영광의 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의 안에 정렬해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영광과 같은 영광을 함께 취하면서 살아 잇고, 사랑스러우며 계속되는 연합 안에서 그와 영원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3. 신랑이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린양의 혼인식이 가까웠다} 우리 구세주는 영원한 언약 속에서 어린 양이셨기 때문에 그래야만 합니다. 그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며 죄인들을 위한 확실한 보장과 대속자가 될 사람으로서 언약이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어린 양으로서 그가 우리를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증명한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의 최고의 증거는 그가 어린 양으로서 도살당하기 위해 끌려 나왔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을 가진 어떤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의심 너머로 가장 사랑하는 자가 우리에게 그의 사랑을 증명해 준 그 증거가 있습니다.
"그가 나를 사랑했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나를 위하여 자신을 준 것이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으니" 결혼에 있어서 사랑이란 쌍방에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처음 사랑하게 된 것은 어린 양으로서였습니다. 우리가 그의 상처와 피를 보기 전까지 어떻게 그를 사랑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어린 양으로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는 어린 양으로서의 그를 사랑합니다.
혼인식은 가장 완벽한 연합입니다. 확실히 예수께서 그의 사람들에게 가장 밀접하게 연합되는 것은 어린 양으로서입니다. 우리가 그를 어린 양으로 볼 때만큼 그렇게 예수님과 하나가 된 적은 없습니다.
내가 그의 열정을 바라볼 때 나는 요한처럼 그의 가슴에 기대어 거의 그의 팔을 의지하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양으로서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왔으며 그런 모습으로 있는 그를 보았을 때 우리가 그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에 가장 고귀하고 영원한 연합을 "어린 양의 혼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4. 이제 마지막으로 신부의 준비를 보겠습니다. "그의 아내로 자신을 준비하였더라."
지금까지 교회는 항상 그의 신부로 언급되어 왔습니다. 이제 그녀는 "그의 아내"입니다. 이 말은 "신부"보다 더 갚고 깊은 성숙한 단어입니다.
자신을 준비하였다는 것은 그녀가 그녀의 주에게 가서 그의 것이 되어 영원히 그와 함께 있는 것을 기꺼이 동의함을 내포합니다.
자유의지는 그것이 우리 안에서 은혜로 발휘될 때를 제외하고는 미지의 것입니다. 은혜는 자유케 하는 위대한 힘입니다. 은혜가 와서 의지를 자유케 해서 선한 것을 선택하기 전까지 의지는 악의 노예입니다.
혼의 행위는 의지로 죄를 그만 두고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될 때 가장 자유합니다. 그 때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됩니다.
그의 아내는 자신을 준비시켰습니다. 즉, 자유로운 은혜가 그녀로 하여금 자유로이 그를 선택하게 한 것입니다. 그녀는 실수에 대항해 투쟁했으며 불신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준비가 무엇인지 알기를 바랍니다. 창녀 교회도 또한 세마포를 입었다는 사실에 주의하십시오. 그러나 창년 교회는 자주색과 비단과 진홍색과 귀한 보석들과 진주로 치장했습니다.
아내의 옷을 보십시오. 그녀의 복장은 얼마나 단순합니까? 정결하고 흰 세마포 뿐입니다. 우리의 경배는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더 좋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하얀 세마포로 만족합니다.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그녀는 창녀가 입고 있는 훌륭한 것들을 구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모든 지혜를 피하고 예수 안에 있는 지혜에 만족합니다. 정결하고 하얀 세마포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겨졌기 때문에 우리의 겉이나 속에는 흠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거룩함으로 덮여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에 최상으로 꾸며져서 신랑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다시 질문 하겟습니다. 여러분은 어린 양을 신뢰합이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희생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를 어린 양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멸시한다면 그리스도의 전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의에서 떨어진 그 어떤 것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 자신이 피로 산 교회를 취하셔서 영원 무궁토록 자신의 배우자로 삼으실 때 그 안에서 아무런 몫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설교문은 1889년 7월 21일 주일 아침에 한 설교로서 < The Metropolitan Pulpit> 제 35권에 실린 것을 간추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