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칼럼 - 2025년 06월 19일 ]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
1. 본문의 배경
야곱은 인생의 위기마다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쌍둥이 형 에서의 축복을 빼앗아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형 에서와 극적인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 앞에 깨어지는 사건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만지시는 개입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세겜에 머무는 동안 일어났던 사건을 다룹니다.
2. 절망과 두려움의 길에서
세겜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추장에게 겁탈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야곱의 아들들은 꾀를 내어 세겜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성을 노략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매우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가나안 족속들로부터 야곱의 가족이 공격당할 위험에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야곱은 완전한 절망과 두려움에 처하였습니다(창 34:30).
야곱에게 임한 고난의 첫째 원인은 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가지 않은 것입니다. 세겜 땅에서 무역 일을 하는 재미를 맛보는 동안에 야곱은 필요 이상으로 그 땅에서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번영을 맛본 후에는 쓰라린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둘째, 야곱은 세상을 사랑하였습니다. 이처럼 약속의 땅을 떠나 있는 사람에게도 번영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는 잠시 있다 사라질 덧없는 번영일 뿐입니다.
3. 말씀하시는 하나님
야곱이 깊은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1절). 그는 오래전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였지만, 돌아갈 수 없는 먼 길을 와버렸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벧엘은 이전에 야곱이 하나님을 뵈었던 곳이니, 그곳에서하나님이 베푸셨던 은총을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의 고통을 겪던 시기에 하나님께서 도우셨던 것을 기억한다면, 그 때 가졌던 마음으로 지금 살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또한 벧엘로 올라가라 하신 이유는 야곱이 세겜 사람들과 헤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야곱과 그의 집안은 이방 땅에서 이방인들과 어울려 사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만의 독특한 유일신 신앙을 잃을 위기에 다다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존하고 전파하여야 할 그가 세상 것들에 취하여 이방의 빛이 될 사명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단을 쌓아 제사를 드림으로서 당신의 거룩한 임재의 빛 앞에서 자신의 현재 모습을 비춰 보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임재의 빛에 비추어 영원한 것과 잠세적인 것, 사랑해야 할 것과 사용해야 할 것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만물의 질서를 따르는 삶입니다.
4. 자신을 준비함
첫째, 이방 신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즉 야곱의 가정에 이미 여러 이방 신상들이 있었고, 이것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힘으로 번영과 행복을 얻으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반영합니다.
둘째, 자신을 정결케 하였습니다. 즉 우상 숭배의 죄로 더러워진 마음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세겜에서의 안이한 삶, 디나 사건과 아들들의 만행 들은 그들의 신앙의 불결로 인함인 것을 야곱은 깨달았습니다.
셋째, 의복을 바꾸었습니다. 이는 불신앙의 습속에서 돌이켜 경건한 행실로 되돌아감을 의미합니다. 성도로서의 아름다운 지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오래된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키십시오. 선한 의지를 가지고 옳은 길을 가려할 때 주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 스펄전과 함께 QT - 2025년 06월 19일 ]
“네 구속자." (이사야 54 : 5)
우리 구주 예수님은 전적으로 우리의 것일 뿐 아니라 영원히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직임은 다 우리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한 왕이요, 우리를 위한 제사장이요, 우리를 위한 선지자십니다. 이제부터 구주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새 호칭을 읽을 때마다 그것도 우리의 것으로 주장합시다. 목자 되신 주님의 지팡이, 주님의 아버지인 하나님의 막대기, 대장되신 주님의 검, 제사장 되신 주님의 관, 왕 되신 주님의 홀, 선지자 되신 주님의 겉옷, 이 모든 것이 다 우리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위엄은 우리를 높이기 위한 것이요 예수님의 모든 특권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신성의 충만함은 우리가 언제든지 가서 사용할 수 있는 무진장한 보고입니다.
우리를 위해 입으신 주님의 온전한 인성 또한 모두 다 우리의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우리 주님은 점도 흠도 없이 깨끗한 주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신 그 생애의 공로를 우리에게 끼치십니다. 자신의 순종과 끊임없는 섬김으로 획득하신 그 상급을 우리에게 부여하십니다. 더럽혀지지 않은 자신의 삶의 의복으로 우리를 덮어 아름답게 꾸며 주십니다.
그의 인품에서 흘러나오는 미덕들은 우리의 보석과 장식품입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의 초인적인 온유함은 우리의 자랑과 영광입니다. 주님은 또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에게 내려오셨는지 배우라고 우리에게 그의 구유를 남겨 주셨으며,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려고 그의 십자가를 물려주셨습니다. 주님의 모든 생각과 감정, 하신 말씀과 행동들, 기적과 중보기도 이 모든 것이 다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슬픔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애의 모든 수고를 통해 천국에 있는 그의 모든 유산을 우리의 기업으로 넘겨주셨습니다.
그는 지금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고 만왕의 왕이요 열방의 주로서 참되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지만 자신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식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우리의 구주십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이 아침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를 “네 구속자"라 부르십시오.
[ J.I패커와 함께 QT - 2025년 06월 19일 ]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 : 15)
당신에게 솔직하게 묻겠다. 예수 그리스도와 당신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또 당신이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나타내는가? 말은 쉽다. 누구나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즐겁게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하신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이전에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으나, 불행하게도 예수님을 부인했다.
이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베드로야, 나는 네가 목자가 되기 원한다. 나는 처음부터 네가 목자가 되길 원했다. 이제는 나가서 목자가 되어라. 그리고 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라.”
예수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어떠한가? 당신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행함으로써 그분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가?(1990c:13, 14)
묵상: 나는 다른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다.
[ 하나님을 맛보는 묵상 - 2025년 06월 19일 ]
다섯 가지 해결책
성경에 개인적으로 하는 결심은 꼭 지켜야 한다는 구절이 있는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라는 말씀은 있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시 76:11). 그러나 이 말씀은 본래 취지와 다르게 우리가 전능자와 주제넘게 협상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육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나 혼자 내버려두시면 저는 내 인생을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한 약속이나 서원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저에게 주시사 주님을 떠나지 않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우리에게 이루어주셔서 감사드릴 뿐입니다”(렘 32:40, 히 13:21). 서원은 하나님께서 나를 죄로부터 지키기 위해 제정하신 방법 가운데 하나다. 하나님께 기도하라. “어느 때 서원을 하는 것이 좋은지 보여 주고 제가 약속한 서원을 지키도록 도와주소서.”
컴퓨터가 가지고 있는 위험을 제시하고 그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다섯 가지 결심을 소개한다.
1. 위험 : 끊임없는 호기심 중독에 빠지기 쉽다. 컴퓨터는 우리를 가상의 세계로 끊임없이 이끌고 들어간다. 윈도우 기본 환경 속에서도 컬러 그래픽, 레이아웃, 스크린 세이버, 쇼트컷, 아이콘, 파일 관리, 계산기, 시계, 달력 등등 일일이 사용법을 다 익히려면 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게다가 소프트웨어 응용까지 들어간다면 점점 복잡한 상황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가상현실이고 능력과 효율의 환상을 심어줄 뿐 결국 마음속에 남는 것은 공허함과 신경 쇠약밖에 없다.
결심 : 컴퓨터 사용 시간을 줄이고 대신 진리의 말씀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겠다.
2. 위험 : 가상현실의 공허함에 빠져 실망하기 쉽다. 머리도 좋고 창의력도 있는 사람들이 현실과 무관한 도시 건설이나 군대놀이나 모험 게임 등에 몇 시간 또는 며칠씩 몰두하는 것을 보면 서글퍼진다. 인생은 유한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사는 동안 실존하는 하늘나라로 가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라고 능력과 재능을 주신 것이 아닌가?
결심 : 건설적이고 창의적인 능력을 허구적인 가상 세계를 위해 사용할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현실 세계를 위해 사용하겠다.
3. 위험 : 컴퓨터와 친밀한 관계에 빠지기 쉽다. 다른 발명품들과는 달리 컴퓨터는 하나의 인격체와 같다. 접속만 하면 게임도 할 수 있고 자신의 성격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영리하기가 개보다 낫다.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 전자 인격체를 대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반면, 사람들과의 실존 관계는 점점 고통스러워질 염려가 있다.
결심 : 전자 인격체와 일정한 거리를 두겠다.
4. 위험 : 이성과 부적절한 관계에 빠지기 쉽다. 부적절한 관계는 이성간에 만나 대화를 하고 속마음을 털어 놓을 때 생겨난다. 오늘날 이런 관계는 이메일을 통해 은밀하게 진행될 수도 있다. 실시간으로도 가능하고 메시지를 남긴 후에도 가능하다. 실제로 데이트를 안 하면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모니터 상의 데이트가 실제 데이트로 발전하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결심 : 배우자 이외의 이성과 일대일 관계를 갖지 않겠다. 미혼인 경우, 타인의 배우자와 이런 관계에 빠지지 않겠다.
5. 위험 : 컴퓨터 포르노에 빠지기 쉽다. 성인 비디오보다 더 음란한 포르노를 사생활이 보장되는 집안에서 즐길 수 있다. 어떤 프로그램은 그러한 행위도 가능하다고한다. 이와 같은 패역한 행위는 영혼을 죽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고 자아를 상실하게 하고 기도를 막고 성경을 읽어도 깜깜하게 만들고 영혼을 싸구려로 전락시키고 영적 능력을 파괴시키고 우리의 영육을 더럽힌다.
결심 : 성적인 자극을 주는 어떠한 프로그램에도 들어가지 않겠다. 이런 프로그램은 구입하지도 다운로드도 받지도 않겠다.
컴퓨터와 인터넷과 이메일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화, 텔레비전, 라디오, 휴대용 전자 게임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간 계획이나 마음과 가정을 파괴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물을 우상화하기도 하고, 그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기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6:12)라고 자문해야 한다. 또한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 116:13-14)라고 결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매순간 우리를 도우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 그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때마다 빈 잔을 내밀며 또 채워달라고 간구한다. 빈 잔을 채워주시면 우리는 결심을 지킨다. 우리 능력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키게 되는 것이다. 컴퓨터를 시작하기 전에 서원하고 이 서원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께서는 그 빈 잔을 채워주실 것이다.
[ 은혜와 사명 - 2025년 06월 19일 ]
사명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 성구 ]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6:8上)
[ 내용 ]
사명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긴장하는 믿음 생활에서 이탈해서 일락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그 안에서 보람을 느끼다가도 얼마 못 가 그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심지어는 버려두고 떠나기까지 할까요? 그들에게 사명감이 있었다면 쉽게 포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최고의 자산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 하는 것을 깊이 아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계획이 아니라 지금, 왜 내가 수많은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보람되게 살다가 죽을 수 있는 인생의 방법이 너무나 많습니다. 추수할 일꾼을 부르는 곳이 너무 많습니다. 가까운 중국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형제 중에 하나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유학 와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중국 복음화에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헌신된 전문인 사역자라고 합니다. 중국에서 자신의 전공을 살려 취업하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필요하다고 목청 높여 호소하는 그 친구의 음성이 지금도 귓가를 맴돕니다. 중국 외에도 수많은 곳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원해 기갈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런 생애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며 훌륭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의 필요와 시급함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취향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자리가 없다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보다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든지 주께서 명하시면 헌신하겠사오니 제게 일러주십시오.” 하고, 주님의 나를 향하신 계획을 물어보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 아닐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간절히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누가 우리를 위하여” 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사명의 마지막 도착지는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만큼의 인생을 살아왔던지,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았던 시간들을 제하고 나면 순수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던 시간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사야 선지자가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부르심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렵니까?
[ 묵상 ]
사명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한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까?
[ 거룩한 삶을 위한 능력, 100일 교리 묵상: 은혜와 사명 - 부흥과개혁사 ]
[ 은혜와 사명 ]
[ 청교도묵상 - 2025년 06월 19일 ]
청교도의 성경교수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사역자들이나 교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성경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가르치는 내용이나 기술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르치는 사람 자신이다. 디모데후서 3장 17절에서는 이것을 하나
님의 사람이 된 후에야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된다고 말씀하고 있
다. 교회사 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청교도들의 성경관과 그들
의 성경 교수법을 살펴보고 우리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
청교도들의 성경관
청교도들은 먼저 성경을 볼 수 있는 평신도들의 권리를 중요시했다. 청교도들
은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었기에 오직 성경만을 최종적인 권위
로 삼았다. 토마스 왓슨은 "당신이 읽고 있는 성경 한 줄 한 줄에서 하나님
이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존 오웬은 "성경의 권위는...... 그 신
적 기원에 있다...... 성경은 성경을 쓰신 분 때문에 권위를 갖는다"고 말했
다. 존 오웬은 성경이 "하나님의 뜻과 심정을 한치 오차도 없이, 또 아무런
오류도 없이 보여 주는 계시"라고 말했다.
청교도들은 성경의 권위를 말할 때 그것을 구원에 관련된 문제로 제한하지 않
고 여러 방면으로 개방해 두었다. 리챠드 십스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어떤 규준도 얻을 수 없다. 단지 성경이 제공하는 일반적인 규준만이 있을 뿐
이다. 그리고 이 규준은 모범에 의해서 보강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천적인
지식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말해서 청교도들이 성경 권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지
표는 그들이 성경을 어떻게 적용했는가를 보면 된다. 그들은 경제, 정부, 가
정, 교회, 인생, 성, 자연, 교육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문제에 성경 본문
과 성경의 모범을 끌어댔다. 청교도들은 제한된 무오설을 수용했는가 아니면
전적인 무오설을 수용했는가? 그들의 이론뿐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삶을
볼 때 그들이 성경을 삶 전체를 위한 규준으로 삼았음이 분명하다.
청교도들의 성경교수관
청교도들은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의 사람이 되어
야 함을 역설했다. 토마스 구드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씀을 기록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였다. ... 그러므로... 이 하늘의 공적 비
서의 도우심이 없다면 인간의 또는 인간들 자신의 이해력으로는 성경을 이해
할 수 없다. ... 그 분이 홀로 그 밭에 지식의 보화들을 숨기셨으므로 그분만
이 그 보화들이 어디 있는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기도로 하나님의 가슴을 열
고 하나님의 연구실을 열어 하나님의 모든 원고들과 문서들로 나아갈 수 있
는 지식의 열쇠를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유익인가!
보다 덜 아기자기하지만 보다 더 명확하게 존 오웬은 같은 주장을 한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일반 원리로 확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성령의 신령한 도우심을 얻기 위한 계속적이며 열렬한 기도는 성경에 나타
난 하나님의 생각에 대한 지식을 얻음에 있어 절대 필요 불가결한 수단이다.
이 지식이 없이는 다른 모든 것들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은 경건하고 겸손하고 기도하고 가르침
을 잘 받고 순종하는 심령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그의 정
신이 관념들로 빈틈없이 채워졌을지라도 그는 영적 실재들의 깨달음에 절대
로 이르지 못할 것이다.
청교도들은 해석하고자 하는 구절이나 본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질문을 하였다.
1. 이 말씀은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2. 다른 성경은 이 본문의 설명
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3. 이 본문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해
서 인간에 대해 어떤 진리들을 가르치는가? 4. 이 진리들은 그리스도의 구원
하는 역사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진리들의 설명
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5. 이 진리들은 어떤 경험들을 묘사하거나 서술하거
나, 또는 창조하거나 고치고자 하는가? 이 진리들은 어떤 실제적 목적을 위
해 성경에 존재하는가? 6. 이 진리들은 우리의 실제적 상황에서 어떻게 나 자
신과 타인들에게 적용되는가? 이 진리들은 현재의 어떤 인간의 상태에 대해
말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믿고 행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맺음말
우리는 청교들의 성경관에서 성경은 모든 삶의 규범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 외의 다른 사상이나 규례는 기독인의 삶을 결코 완성케 할 수 없
는 것이다. 또한 성경교수관을 통해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 통치가 구
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
야 할 교회가 늘 심중에 담아두어야 할 지침일 것이다.